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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 할머니가 세상사는 법(옮긴 글)
작성자 신길순 등록일 13.11.09 조회수 206


                                      



 

지난달 3일 오후 430분 연세대 공학원에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들어섰다.

길거리에서 파는 허름한 꽃무늬 셔츠에

검정 치마 차림.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뽀글이 파마'를 했고,

검게 그을린 얼굴에 검버섯이 몇 개 보였다.

동네 마실 나온 60대 시골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교직원 한 사람이 "무슨 일 때문에 오셨느냐"

물었지만 할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한참 뒤 할머니가 조그맣게 말했다.

   

"돈을 좀 내러 왔는데.

1년 전에도 한 번 와서 돈을 조금 내놓은 적이

있어요."

   

   

교직원은 장학금 기부를 담당하는 대학본부

대외협력처로 급히 연락했다.

엄태진(45) 대외협력처 부국장이 전화를 받고

한달음에 달려와 할머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지난해 4, 1억원이 든 봉투를 남기고 총총히

사라진 바로 그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당시 정 할머니는 자신이 누구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다.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는 질문에 '정씨'라고만

했었다.

귀한 뜻을 어디에 쓰면 좋겠다는 기부 약정서도,

기부금을 건넸다는 영수증도 다 필요 없다며

서둘러 자리를 뜨는 할머니에게 엄 부국장은

"꼭 한 번 연락을 달라"며 명함을 건넸었다.

   

   

정 할머니는 "기억해 줘서 고맙다" 며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은 첫 만남 때보다 핼쓱했다.

잔주름도 부쩍 늘어 있었다.

   

"따뜻한 녹차 한잔하시죠."

엄 부국장이 사무실 한쪽 작은 방으로 할머니를

안내했다.

   

"안부 인사 드리고 싶었지만 연락처가 없어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다 늙은 사람 안부는 물어 뭐해요."

   

   

정 할머니가 팔목에 끼고 있던 검정 비닐봉지를

뒤적였다.

빳빳한 새 수표 몇 장이 나왔다.

1000만원짜리 2, 500만원짜리 1, 100만원짜리 5.

모두 3000만원이었다.

"이번에도 조금밖에 안 돼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써 주세요. 외부에는

알리지 말고."

   

  

찻잔을 앞에 두고 10분을 함께 앉아 있었지만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거의 없었다.

왜 또 큰돈을 내놓게 됐는지,

연세대와의 인연을 묻는 엄 부국장에게 정 할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작년 연세대에 1억원을 기부할 때 할머니는

"그동안 살던 곳이 재개발되면서 받은

토지보상금"이라며

"자식 셋은 대학 공부는커녕 밥도 제때 못 먹였지만

연세대 학생들이 이 돈으로 열심히 공부하면 좋겠다"

말했다.

   

   

정 할머니는

"이번에는 성함과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

간곡히 부탁하는 엄 부국장에게

"나는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로 집까지 모셔 드리겠다" 고 해도

정 할머니는 "괜찮다" 며 고개를 저었다.

"버스정류장까지만이라도 배웅하겠다"

엄 부국장이 나서자

"바쁠 텐데 무슨 배웅" 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공학관에서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3000만원을 쾌척하고 돌아가는 정 할머니는

허름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파주행 버스에 오른 할머니는 "어여 들어가요"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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