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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편지 59호(청렴한 위인 동악 이안눌)
작성자 제천제일고 등록일 14.07.29 조회수 151

 

청렴한 위인 동악 이안눌

 

 

이안눌(李安訥(선조4년(1571)∼인조15년(1637)>의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본관은 덕수(德水,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에 있었던 지명)이며,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행(李荇)의 증손자이다.

선조 32년(1599)에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처음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벼슬길에 오른 다음 형·호·예조의 좌랑을 거쳐 단천군수(端川郡守), 동래부사, 승지, 형조참판, 함경도관찰사, 예조판서,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이안눌의 양모인 구(具)씨 부인은 당시 전국에서 이름난 갑부였다.

그러나 그는 40년 가까이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언제나 가난한 선비처럼 검소하게 살았다. 그는 고을살이를 하면서 세금과 부역을 줄이고 나라의 재물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치밀하면서도 그 많은 집안의 재산은 일체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고향인 충남 당진군 면천면을 비롯해서 전국에 널려있는 그의 농토를 남들이 제멋대로 차지하는가 하면 어떤 때에는 가난한 친구에게 부상으로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이안눌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 아니라 동기간의 우애도 각별했다. 그는 병란 중에 집이 불타버린 백형을 위해 집을 마련해주고 백형이 작고한 다음에는 질녀들의 혼사를 자기 딸처럼 돌보아 주었다. 또 식솔이 많으면서 가난하게 사는 중형을 위해서도 그는 평생을 두고 생계를 돌보아 주었으며 남산(南山) 밑에 있었던 큰 저택도 서슴지 않고 조카에게 주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낡은 헌옷과 가난한 식생활로 한평생을 살았다.

이 때문에 이안눌은 인조 14년(1636)에 왕으로부터 정려문을 받고 청백리에 녹선 되자 이를 굳게 사양했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안눌은 청백리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진정한 청백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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