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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 편지 제78호(아곡 박수량)
작성자 제천제일고 등록일 16.03.29 조회수 153

 

<「청렴-충북교육」 청렴 편지 제78호 >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

 

 

박수량(朴守良)<성종 2년(1491년)∼명종 9년(1554년)>의 자는 군수(君遂), 호는 아곡(莪谷), 시호는 정혜공(貞惠公), 본관은 태인(泰仁; 지금의 정읍군 태인면)이다. 그는 전남 장성(長成)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호남의 선비였던 김개(金漑)에게 학문을 배웠다. 재주가 있었을 뿐 아니라 향학열이 대단하여 언제나 책을 끼고 다니면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중종 8년(1513), 23세 때 진사에 오르고, 다음 해에 문과의 을(乙)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광주(廣州)의 훈도로 나갔다가, 다음 해에 승문원으로 들어와서 부정자를 거쳐서 박사, 지평, 고부 군수(古阜 郡守), 사간, 보성군수, 좌승지, 호조참판, 함경도관찰사, 담양부사, 한성판윤, 형조판서, 우참찬, 전라도관찰사, 호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 중종, 인종, 명종의 3대 임금을 섬기면서 38년 동안 벼슬살이를 했다.

 

 

‘지족(知足)’으로 일관해 청백한 생애

 

 

박수량은 외유내강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수더분하여 조금 모자라는 것 같았으나, 심지가 대단히 곧고 굳었다. 그는 지족(知足) 즉 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을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국가와 사회에 봉사했다.

박수량은 재상까지 지내면서도 뇌물을 일체 멀리 하였을 뿐 아니라, 집안 살림에도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명종실록(明宗實錄)에서 사관(史官)은 “그의 청렴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문의 공은 아니다<기청출어천성, 이비유학문지공야(其淸出於天性, 而非有學文之功也)>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처럼 그의 청렴결백한 생활이 남긴 일화는 너무나 많다. 하루는 그의 자제가 서울에 살림집을 한 채 지어야 하겠다고 그에게 상의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는 크게 놀라면서 “나는 본래 시골 태생이면서도 우연히 임금님의 성은을 입어 과분한 벼슬살이를 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서울에다가 집을 짓겠다고 한단 말이냐.”하고 자제들의 분수에 어긋나는 생각을 크게 꾸짖었다. 그리고 그는 또 자제들에게 고향에 가서 집을 건축하되, 결코 까래가 10여개 이상 되는 큰 집을 짓지 말도록 엄중히 당부하였다.

 

 

초가삼간도 없는 재상

 

 

한 번은 박수량이 나라의 재산을 빼돌려서 사복을 채우고 있다는 말이 명종에게 알려졌다. 이 말을 들은 명종은 암행어사로 하여금 진상을 조사토록 하였다. 과객으로 가장한 어사가 박수량의 고향 본가에 머무르면서 살펴보니 집은 낡아서 빗물이 샌 자국이 역력하고, 대접으로 나오는 식사도 형편이 없었다.

암행어사가 이러한 사정을 사실대로 복명하였다. 그러나 명종은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다시 다른 어사를 보내어 이를 재확인하였다. 그런 다음에야 안심을 하고 박수량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 때문에 호남의 명유 김인후(名儒 金麟厚)가 지은 박수량의 묘비명(墓碑銘)에는 “벼슬살이 38년에 지위는 재상에 이르면서도 초가삼간 집 한 채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박수량은 의정부 우참찬으로 있던 명종 7년(1551) 11월에 안현(安玹) 등 42명과 함께 염근리(廉謹吏), 곧 청백리로 뽑혔다. 이렇게 청백리를 한꺼번에 많이 뽑은 것은 당시 문란했던 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박수량은 평소에 자제들에게 그가 죽은 다음에 시호(諡號; 재상이나 어진 선비가 죽은 뒤에 임금이 그들의 행적을 칭송하여 내리는 이름)를 청하지 말 것이며, 무덤에 비석도 세우지 말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그는 지중추부사로 있을 때인 명종 9년(1554) 정월에 신병으로 작고했다. 그의 나이 64세 때였다.

 

 

 

무덤에 세운 백비(白碑)의 유래

 

 

그러나 평소에 청렴하게 살면서 가업을 돌보지 않았던 그에게는 고향으로 운상할 비용조차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명종은 크게 슬퍼하면서 조회를 이틀간이나 파했다. 그리고 조정으로 하여금 부의를 내려서 장사를 치르게 하는 한편, 전라도 관찰사에게 하명하여 유족을 돕도록 하였다.

또 명종은 예관(禮官)을 보내서 제사를 올리게 했는데, 명종은 그 제문 중에서 “마음속은 충실하여 남음이 있으면서 겉으로는 모자라는 것 같고, 집에는 남은 재물이 없어 더욱 중용할 만한데 아깝기 한이 없도다<내실유여(內實有餘) 외사부족(外似不足) 가무여속(家無餘粟) 익용가석(益用嘉惜)>.”라고 탄식하였다. 박수량의 사람됨을 잘 표현한 구절이라고 하겠다.

한편, 박수량의 청렴결백한 행동에 감동한 명종은 그 뒤에 어명을 내려서 서해(西海)에서 돌을 고르게 한 다음, 그의 무덤에 하사하시면서 “박수량의 청렴결백함을 너무나 잘 알면서 비석에다가 새삼스럽게 이를 기록한다는 것은 그의 청렴함을 잘못 전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여 비문(碑文)없이 그대로 세우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박수량의 무덤에 있는 백비(白碑)이다.

 

 

목민관(牧民官)으로서도 훌륭한 치적

 

 

박수량은 청백리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또 지극한 효행으로도 명하다. 그는 조정에 있으면서도 고향의 늙은 부보를 잠시도 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38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면서 모를 공양하기 위해임금에게 상소하여 고부(古阜)군수, 보성(寶城)군수, 담양(潭陽)부사 등으로 세 차례나 외직에 나갔다.

그는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성심을 다 기울였다. 그가히 담양부사로 있을 때에는 어머님이 이질을 앓아 위독하자 10여일에 걸쳐서 손수 탕약을 달여서 올렸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는 3년 동안 복상을 하면서 한 번도 여막밖에

 

오는 일이 없었다.

박수량은 또 정치(政治)에도 매우 밝았으며, 국사를 집행함에 있어서는 불의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박수량이 형조판서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와 함께 조정에 있는 어느 판서가 광주(光州)에 있는 수령의 비행을 잘 처리해 줄 것을 청탁했다.

그러나 박수량은 국사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조그마한 사정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기어이 그 수령을 처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그는 치정에도 밝았기 때문에 명종실록(明宗實錄)은 그의 “처사가 극히 정밀하고 자상하다<처사극기정상(處事極其精詳).”고 기록하고 있다.

박수량은 학문에도 조예(造詣)가 깊어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있을 때에는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당시 학자이면서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이황(李滉), 주세붕(周世鵬)과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박수량은 문벌이 없는 평민의 집안에서 입신하여 38년 동안의 벼슬살이를 통하여 그가 스스로 쌓은 학문과 능력으로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지족(知足)’의 분수를 지키면서 한 평생을 깨끗하게 살아온 보기 드문 청백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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