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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 편지 제75호(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
작성자 제천제일고 등록일 15.11.30 조회수 146

 

<「청렴-충북교육」 청렴 편지 제75호 >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

 

 

■ 일제강점기, 판사직을 버리고 독립운동가 무료 변호

 

1887년 태어난 김병로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며 자랐다.

그는 1902년 조선 최후의 성리학자 간재 전우의 문하가 되었다가 일본 군함을 견학한 뒤 '우리의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서구의 물질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신학문을 배웠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병로 선생은 18세 나이에 5~6명의 포수들과 함께 면암 최익현 의병부대에 합류했다가 의병부대가 해산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김동신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순창의 일본인 관청을 습격하기도 했다. 일본의 탄압으로 의병 활동을 더 이상하지 못하자 창흥 의숙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고, 1910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경술국치'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던 선생은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도쿄 유학을 떠나, 1913년 메이지대 법과와 니혼대학 법과 졸업장과 주오대학 법률고등연구과 수료증을 받고 귀국하였다. 1919년 밀양지원 판사가 되었으나 1년 만에 사임하고 서대문 자택에서 변호사를 개업한 후 조선변호사협회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김병로 선생은 변호사로 개업하자마자 상해임시 정부요인 안창호, 여운정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부터 독립운동과 관련된 '김상옥 의사 사건','2차 의열단 사건','6.10만세 사건','광주학생독립운동' 등에 직접 변호를 맡아 뛰어 다녔다.

이런 그를 일제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김병로 선생이 연사로 나서는 집회는 금지되고,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고, 1931년에는 6개월 동안 변호사 정직처분까지 받았다.

결국, 그는 8.15 해방이 될 때까지 금주, 금연 등의 절제된 생활을 하며 은둔 생활을 했으며, 나라 없이 방황하는 자신의 모습을 빗대어 '가인(거리의 사람)'이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 공직자에겐 청렴이 우선이다.

 

 

대한민국 초대 법원은 영하 5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으면 난방을 허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니 법원 직원들은 군용점퍼를 입고 언 잉크병을

 

숯불로 녹여 사무를 봤다.

연필은 3cm가 남을 때까지 썼고, 담배는 아예 반으로 잘라 파이프에 꽂아 피웠으며, 점심은 항상 자기 사무실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지방법원 판사들도 마카오 양복을 입고 다니던 시절, 그는 홀로

'한성라사'에서 맞춘 국산 양복만 입었다.

대법원장한테 나온 관용차로 따님조차 한 번도 태워주지 않은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무부는 서소문 법원청사 뒤편에 있는 귀속 재산을 법원 용지로 쓰라고 건의했지만, 그는 한 번에 거절하기도 했다.

그의 삶은 미군정의 젊은 영관급 장교들 사이에서도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는 지독히도 '선비형 법률가'로 대쪽같은 청렴함을 유지하면서 원칙을 지켰던 법조인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면서 나라의 산업을 생각하고, 국가의 재산을 아꼈던 그의 삶은 진정한 공무원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 이승만 대통령과 맞장 뜬 대법원장

 

이승만 대통령은 김병로 선생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하지 않으려고 했다. 우선 그가 자신과 정치적 노선이 다른 사람이었고, 너무 청렴하고 대쪽같은 성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할 수 없이 대법원장에 임명했는데, 그 대쪽같은 성품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민족의 과제임을 천명하고,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족특별법 개정을 요청하자 이를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이 친일파를 옹호하고 반민특위를 해산하자, 이에 대해 정면으로 대통령을 비판하고 나섰다.

“6.6사건은 중부 경찰서의 단독 결정이 아니라 내무부의 명령에 따라 빚어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경찰의 이 행위는 직무를 초월한 과잉이며 불법이올시다.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중대하기 때문에 국회와 정부 당국은 비상시국에 적정한 정치적 조치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따라서 사법기관에서는 추호도 용서없이 법대로 판단할 것입니다.”

 

1950년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자, 법원은 국회의원에게 징역 3~10년의 가벼운 형벌을 내렸다. 또한 안호상 전 문교부 장관의 국보법 위반사건, 윤재구 의원 횡령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또한, 이승만 독재를 반대하는 서민호 의원이 자신을 살해하려던 서창선 대위를 사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당방위로 그를 풀어주자, 이승만은 다시 부산정치 파동(부산에 공산 게릴라가 침투했다고 조작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의 정치공작)을 구실삼아 서민호 의원을 구속했지만, 법원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에 대해 이승만은 화가 나 김병로 대법원장에게 따졌다.

“도대체 그런 재판이 어디있습네까? 현역장교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는데 무죄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네까?”

그러자 김병로 대법원장은 당연하다는 듯 잘라 말했다.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인 나도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되지 않습니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부산정치파동 직후 김병로 대법원장이 대법관들에게 강조했던 말)

김병로 대법원장의 독립운동가 변호나 청렴한 생활도 아주 중요한 덕목이지만, 그가 사법부의 독립을 강력하게 외쳤고, 그것을 위해 대통령이 화를 내도 판사들을 막아주며 사법부를 지켰다는 점도 우리 대한민국 사법부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그를 미워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탄압에도 버티고 버텨 70세의 나이로 정년퇴임을 하였다. 그는 정년퇴임한 후에도 변호사 개업도 하지 않아 '전관예우'와 같은 일은 하지도 받지도 않았다.

그가 퇴임하면서 했던 말은 그가 어떻게 대한민국 대법원을 이끌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출처 – 지식채널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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