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 편지 제66호(충무공 이순신의 청렴과 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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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제천제일고 | 등록일 | 15.02.24 | 조회수 | 164 |
<「청렴-충북교육」 청렴 편지 제66호 >
충무공 이순신의 청렴과 업적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명장일 뿐만 아니라 청렴결백한 생활과 죽는 순간까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한 애국심, 백성들과 부하를 내 몸과 같이 아끼는 마음, 자신의 일은 자신이 끝까지 책임지는 책임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삶을 살았다. 무과 시험을 치를 때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시험에 임했던 모습은 늠름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전라 좌수사가 되었을 때부터 쓰기 시작한‘난중일기’는 이순신의 치밀하고 세심한 준비성이 잘 나타난다. 육지의 싸움에서 우리나라가 패하고 있을 때 이순신이 바다에서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원균의 모함 때문에 백의종군한 이순신의 충정은 위대하였다. 원균의 모함을 받아 한양으로 잡혀 가던 날 수 많은 백성들이 길바닥에 엎드려 통곡하였다고 한다.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알을 맞고 쓰러졌을 때 자신의 죽은 모습을 보이지 말라던 이순신의 말은 유언이 되었다. 이순신이 죽은 것을 모르는 왜군은 사기를 잃고, 우리의 군사들은 용기백배하여 싸움에 승리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한 이순신은 그의 청렴함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이순신이 전라도 발포라는 곳에서 만호라는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전라 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발포 관아의 오동나무를 베어오라며 사람을 보냈다. 이에 이순신은‘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므로 함부로 벨 수 없다’며 사람을 돌려보냈을 뿐 아니라, 나라가 위급한 시기에 거문고를 만들어 풍류를 즐기는 것의 잘못을 지적하기까지 하였다. 투철한 조국애의 전략으로 조선을 지켜낸 이순신 장군은 청렴에 있어서도 후세의 모범이 되고 있다. < 이순신 장군 어록 >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머리가 나쁘다 말하지 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았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몸이 약하다고 고민 하지 말라. 나는 평생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 갖지 말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 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말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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