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백비(白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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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제천제일고 | 등록일 | 14.12.25 | 조회수 | 134 |
무덤 앞에 세워지는 비석에는 일반적으로 고인의 이름과 직위와 업적 등이 새겨집니다.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후세에 남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비석에 단 한 글자도 새기지 않은, 그래서 하얀 돌로만 서 있는 백비(白碑)가 있다면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무 것도 새기지 않은 대표적인 백비가 우리나라에도 하나 중국에도 하나가 있는데, 글자를 새기지 않은 것은 같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예로부터 장성은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장성에서 글 자랑을 하지 마라’(文不如長城), ‘한양에 있는 만 개의 눈이 장성에 있는 눈 하나만 못하다’(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바로 그 장성에 아곡(莪谷) 박수량의 청백리 정신을 기리는 백비가 있습니다.
박수량 선생은 1491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서 태어나 23살 진사에 급제함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예조좌랑, 형조정랑, 병조정랑, 호조판서, 한성판윤, 전라도관찰사, 좌찬성지 중추부사 등 39년간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고위 공직에 몸을 담았으면서도 접대 한 번 뇌물 한 푼을 받지 않았고 부정한 뒷거래도 없이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살았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남긴 유품이라곤 명종이 하사한 술잔과 갓끈뿐이었습니다.
선생은 죽으면서도 두 아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절대 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는데, 실제로 집 한 채도 없이 돌아가 초상마저 치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를 본 대사헌 윤춘년이 명종에게 “박수량은 워낙 청백한 사람이라 멀리 서울에 와서 벼슬을 하면서도 남의 집을 빌려 살고 있었으므로 고향인 장성으로 돌려보내 장사지내고자 하오나 자력으로써 할 수 없사오니, 만일 이런 사람을 국가에서 표창하여 주면 관리들에게 크게 장려될까 하옵나이다.” 고하였고, 이에 감동한 명종이 서해 암석을 골라 비를 하사하면서 행여 비문을 새기다 그 청백함에 누를 끼칠까 염려가 되니 비문 없는 비를 세우라고 명함에 따라 백비가 세워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국 명나라 황제의 능 13기가 몰려 있는 ‘명십삼릉’은 만리장성, 이화원, 천단 등과 함께 베이징 인근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 중 하나입니다. 바로 이 ‘명십삼릉’의 명물 중 하나가 ‘만력황제 무자비’입니다. ‘무자비’(無字碑)란 말 그대로 ‘문자가 없는 비석’을 말합니다.
만력제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황제인데, 그는 명나라 역사상 가장 무능한 황제였습니다. 그런데도 과시욕은 아주 심해 자기 비석에 새길 내용을 글 잘 하는 신하들에게 짓게 했는데, 문장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사람의 글로는 내 공적을 묘사할 수 없다’며 비석에 글자를 새기지 말라 했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록할 만한 공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글자 없는 비석을 세운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똑같은 백비, 그렇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부디 우리의 삶이 박수량 선생처럼 세상의 평가를 저만치 넘어서는, 향기로운 여백이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loveyou304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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