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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편지 44호(자신이 추천한 관리를 파면시킨 황희)
작성자 신길순 등록일 13.04.25 조회수 209

<자신이 추천한 관리를 파면시킨 황희>

 

세종대왕이 왕자로 있을 때 세자 책봉을 극심하게 반대하다 귀양까지 간 사람이, 세종대왕이 왕이 되어서는 정승을 가장 오래하는 진 기록을 남기기도 했던 인물이다.

 

황희는 쓸만한 젊은이를 종성부사에 임명하여 나라에 충성하도록 배려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황희 정승이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감사의 표시로 조그마한 이불을 하나 만들어 전해 주었다.

 

평소에 입는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이부자리도 형편없다는 얘기를 들어서 황희 정승의 건강이나 해치지 않을까 염려해서 였던 것이다. 그런데 황희가 그 이불을 덮고 자는데 웬지 다른 이불보다 너무나 따뜻하고 좋아서 부인에게 이불 속을 뜯어보라 하니 이불속에는 수달피 가죽털이 있었던 것이다.

 

종성부사는 황희 정승이 잠자리라도 따뜻하게 지내시라고 배려한 것이다. 황희는 그 즉시로 종성부사를 파면시켜 버렸다.

 

그러자 부인이 그것은 너무하지 않느냐, 대감의 건강이 걱정되어 그랬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자, 황희는 말하기를 “성의는 나도 잘 압니다. 그러나 내가 수달피 이불을 선사받은 소문이 퍼져 보시오, 내 체면도 체면이거니와 종성지방의 수달은 진상품으로 마구 잡히어 씨가 마를 것이오.

 

내가 그를 종성부사로 추천한 것은 그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나라에 공헌하라는 뜻이니, 굳이 나한테 감사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로 이만한 선물을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를 잘못 본 것 같소.“

 

이 대답을 통해서 우리는 황희 정승의 성품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아들을 결혼시킬 때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일체의 예물을 받지 않았고 시집온 며느리가 집안일에 서투르자 결혼한 지 3일만에 친정 집에 보내서 집안의 대소사를 익혔다고 생각될 3년만에 다시 맞아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황희는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했으나 고려가 망한 뒤 두문동에 의거하다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정사에 참여했다. 그는 다섯 번이나 파직되거나 귀양을 갔으면서도 조정의 벼슬은 6조판서를 비롯 안해 본 것이 거의 없었다.

 

성균관 학관, 춘추관 감찰, 경기도 도사, 형조정랑, 예조정랑, 이조정랑, 병조정랑, 도평의사사 경력, 병조의랑, 승정원좌대부인, 형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행랑도감제조, 호조판서, 공조판서, 평안도 도순문사, 참찬, 강원도 관찰사, 찬성,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만도 18년을 기록했으니 그의 생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세자 책봉을 가장 극심하게 반대한 황희를 그토록 오랫동안 정승 자리에 썼던 세종대왕의 현명하심도 돋보이는 대목이다.

 

 

관직을 다스릴 때에는 공평함 만한 것이 없고,

재물을 임하여서는 청렴함 만한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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